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리 브란트 (문단 편집) === 출생과 가족 === 출생 및 가족사가 워낙 복잡한 관계로 그의 가족사는 그가 정계에 진출한 [[1949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내용을 대부분 철저히 함구했고, 지인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때문에 적어도 브란트가 정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가족사의 상당 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었고, 무성한 의문과 의혹을 낳기도 했다. 그는 사망하기 3년전인 [[1989년]]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가족사의 진실을 처음으로 어느정도 정확하게 밝혔다. 이후 그의 사후 언론에 의해 구체적인 사실이 일부 탐사되기도 했는데,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달리 미화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특히 [[1948년]] 이전 그의 행적 및 가족사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빌리 브란트 본인의 진술 및 저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정계 입문 시절부터 그가 은퇴한 이후까지 남긴 다양한 진술과 증언, 저서들에는 상충되는 내용들도 있다. 그의 충직한 전기 작가들조차도 그가 진술한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1913년 12월 13일 북독일의 항구도시 [[뤼베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의 생부 욘 묄러(John Möller)는 빌리 브란트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이내에 직장과 거주지를 급히 처분하고 고향 함부르크로 도망치듯 떠났다. 빌리 브란트는 출생 후 1914년 2월 성로렌츠 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았으나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당안에서 세례를 받지 못했다. 빌리 브란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프람'''(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 Herbert Ernst Karl Frahm)이었는데, 사생아였기에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어 외할아버지의 성인 프람(Frahm)을 물려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 마르타도 사생아 출신이고, 외할아버지조차 어머니의 친부가 아닌 계부였던 관계로 프람이라는 성은 그와는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성이었다. 1918년말부터 빌리 브란트는 외할아버지인 루트비히 프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가정은 매우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루트비히 프람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메클렌부르크의 한 영지에서 [[농노]][* 당시까지 독일 제국이었고, 토지 귀족 용커들은 여전히 독일의 기득권층의 하나였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중세시대 농노처럼 신분적으로 평생 완전히 예속된 상황은 아니었고, 본인의 의지로 농노가 되고, 또 그만둘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로 일하면서 빌리 브란트의 외할머니인 빌헬미네 에베르트(Wilhelmine Ewert -> 빌헬미네 프람)와 알게 되었고 그들은 결혼했다. 루트비히 프람은 자녀가 없었지만, 빌헬미네는 프람과 만나기 전에 19살 때 낳은 사생아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바로 빌리 브란트의 친어머니 마르타였다. 루트비히와 빌헬미네가 결혼하면서 프람은 마르타의 계부가 되었고, 마르타는 계부의 성을 따라 마르타 프람이 되었다. 그런데 마르타 역시 10대 후반의 나이에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가 빌리 브란트였다. 빌리 브란트는 1913년에 태어났고,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친 외할머니 빌헬미네는 사망했다. 그리고 1914년 전쟁이 터졌고, 루트비히 프람은 징집되어 전장에 나갔다. 1914년 이후 6살 때까지 빌리 브란트는 편모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 마르타는 가게의 현금출납원으로 일을 나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 빌리 브란트는 주로 이웃집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트비히 프람은 살아 돌아왔고, 마르타는 돌아온 계부 루트비히 프람의 집에서 아들인 헤르베르트 프람(브란트)과 함께 살기로 했다.[* 루트비히 프람과 빌헬미네는 마르타가 세 살 때 결혼했으며, 이미 마르타가 한 살 때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때문에 마르타는 어린 시절부터 계부 루트비히 프람과 함께 살아왔다.] 브란트 입장에서는 한살 때 헤어진 프람을 기억할 수는 없었고, 다섯살이 되어 전장에서 돌아온 외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셈이었다. 그런데 루트비히 프람은 제대한지 석달 후인 1919년 1월 뤼베크에서 도라 살만이라는 여자와 재혼했다. 도라 역시 사민당 지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루트비히 프람, 도라 살만, 마르타 프람, 헤르베르트 프람(빌리 브란트) 이렇게 네 사람이 동거를 하게 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루트비히 프람이 진짜 외할아버지라고 믿었지만, 도라 살만이 친 외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라 살만에게는 한번도 할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고 아줌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빌리 브란트는 의붓 외할아버지인 루트비히 프람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사실 루트비히 프람과 빌리 브란트의 나이 차이는 38세여서 할아버지-손자 나이차가 아니고 아버지-아들 나이 차이에 가까웠다. 어머니 마르타가 19살 때 빌리 브란트를 낳았고 마르타의 어머니 빌헬미네 역시 이른 나이에 마르타를 사생아로 출산했기 때문. 빌리 브란트는 어린 시절 루트비히를 'Papa'라고 불렀다. 그는 자서전에서 친부가 없었던 자신에게 루트비히 프람이 대신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예를 들어 학교 성적표의 부모 확인 사인을 받아야 할 때 루트비히 프람이 아버지란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루트비히 프람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빌리 브란트는 루트비히 프람이 4년 동안 전쟁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진짜 친외할아버지인 줄 알고 자랐다. 의붓 외할아버지 루트비히 프람은 노동자(공장의 운전사)였으며, 트럭 운전사가 되기 전 젊은 시절에는 [[농노]], 마부 등을 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열성 행동 당원이었고, 자신이 다니던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마르타와 그의 아들인 빌리 브란트에게 어린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주입시켰으며 그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SPD에 가입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루트비히 프람은 어린 빌리 브란트에게 SPD의 역사에 대해 자주 설명했으며, 빌리 브란트가 훌륭한 사민당 인재가 되길 바랬다. 브란트가 일곱 살 때 루트비히 프람이 일하는 공장 주변의 빵집의 빵을 바라보고 있자 공장의 관리인이 그걸보고 브란트에게 빵을 사주었다고 한다. 루트비히 프람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화를 내며 빵을 돌려주라고 말했다. 루트비히는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어떤 선물도 맏지 않는 거야! 우리는 적들로부터 매수당해서는 안돼! 우리 노동자는 적선을 받는 거지가 아니야!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하는 것이지 선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당장 빵을 돌려주라고 말했고, 이는 일곱살짜리 브란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람과 브란트는 갈등이 컸다. 이런 관계는 빌리 브란트에게 유년 시절 큰 결핍을 가져다 주었으며, 올바른 인격 형성의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브란트는 유년 시절 기댈 곳을 간절히 찾았지만 기댈 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여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압하자 루트비히 프람은 깊은 좌절에 빠졌고, 같은 시기 빌리 브란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탈출하여 스칸디나비아에서 도피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34년 도피처에서 빌리 브란트는 외삼촌[* 이 외삼촌은 루트비히 프람과 빌헬미네 사이의 아들이며, 마르타 프람의 이부형제였다.]으로부터 루트비히 프람이 자신의 친외할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졌다. 1935년 나치의 집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루트비히 프람이 결국 자살했다. 빌리 브란트는 스칸디나비아에 도피해 있다가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빌리 브란트의 친어머니 마르타 역시 열성적인 사회민주당(SPD) 행동 당원이었다. 마르타는 주 6일간 일을 해서 일요일에나 빌리 브란트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일요일에도 그녀는 당의 모임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사민당 동아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나중에 아들 헤르베르트(빌리 브란트)를 데리고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빌리 브란트는 훗날 어린 그에게 어머니와 외출하여 사민당 집회 참석하는 것이 기분 전환이 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빌리 브란트가 14세 때인 1927년 마르타는 에밀 쿨만이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쿨만은 벽돌공이었고, 역시 사회민주당(SPD)원이었다. 마르타와 빌리 브란트는 쿨만과 그의 자녀와 함께 재혼가정 아닌[* 그의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외자로 빌리 브란트를 낳았기 때문에 쿨만과의 결혼은 재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르타와 에밀 쿨만 모두 자녀를 데리고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재혼가정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되었다.] 재혼가정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결혼함에 따라 이름이 마르타 쿨만으로 바뀌었고, 헤르베르트 프람만이 쿨만 가족 중에서 다른 성을 쓰게 되었다. 1928년 마르타와 쿨만 사이에서 [[이부형제]]인 귄터 쿨만이 태어났다. 빌리 브란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편모가정]]과 재혼가정에서 자라며 [[애정 결핍]]과 아버지가 없다는 박탈감으로 인해 많은 방황을 했던 시기라고 밝혔다. 어머니가 재혼가정을 꾸린지 2년 후인 16살 때 브란트는 SPD 청년부에 가입했고 이듬해인 17살에는 정식 성인 당원이 되어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시작했다. 빌리 브란트의 생물학적 친아버지는 함부르크 출신의 욘 하인리히 묄러(John Heinrich Möller)였다. 빌리 브란트는 친아버지인 묄러와 평생 만난 적이 없다. 그의 친부 묄러는 빌리 브란트가 태어나자마자 도망치듯 뤼베크를 떠나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즉 빌리 브란트는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 그의 친아버지 욘 묄러는 자신의 혼외 아들인 빌리 브란트에게 평생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한번도 혼외 아들을 찾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독일의 언론과 작가들은 빌리 브란트의 친부인 욘 묄러의 행적을 조사해 왔다. 욘 묄러는 생전에 혼외 아들인 빌리 브란트를 위한 양육비를 제공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욘 묄러가 법적 책임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친사민당 언론조차도 욘 묄러가 그의 혼외 아들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빌리 브란트 역시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친아버지를 증오했고 친부에 대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1948년 당시 노르웨이 국적자였던 빌리 브란트는 귀국하여 다시 독일 국적을 취득하길 원했고, 이때 절차상 친부의 이름을 기재할 필요가 있었다. 빌리 브란트는 어머니에게 친아버지의 이름을 물었고 어머니 마르타는 편지로 John Möller라 답했다. 그때 빌리 브란트는 처음으로 친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는 독일 국적을 재취득할 때 헤르베르트 프람이라는 본명을 버렸고, 망명 중에 썼던 가명 중 하나인 '빌리 브란트'로 아예 개명했다. 프람은 그와 혈연적으로 무관한 성이라 쳐도 헤르베르트는 그의 친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이긴 했다. 욘 묄러와 빌리 브란트는 서로를 찾지 않았고, 평생 만난 적이 없다. 빌리 브란트가 1950년대에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을 때 욘 묄러는 서베를린 시장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들을 찾지 않았고, 이웃에게도 서베를린 시장이 자기 아들이라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의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욘 묄러가 사망한 후에야 묄러 측 친척이 빌리 브란트에게 생부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복잡다단한 가족사, 특히 그의 친부에 대해서 만년까지 거의 진술을 회피했다. 그가 정계 거물인 만큼 당연히 언론과 정계에서는 그의 출생의 비밀과 가족사에 대해 여러 관심과 의혹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정치 활동을 하던 당시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친부에 관한 이야기는 철저히 터부시되었다. 그의 친부 욘 묄러(John Möller)는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1958년까지 생존해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빌리 브란트의 친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빌리 브란트의 본명었던 프람이 사실은 그와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 역시 1989년까지 독일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처음으로 소상히 밝힌 것은 그가 사망하기 3년 전인 1989년 자서전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친부에 대해 언급했고, 또 자신의 본래 성을 물려주었던 루트비히 프람이 사실은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의붓외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또한 여기서 밝혔다. 참고로 브란트의 후계자인 [[헬무트 슈미트]]도 [[사생아]] 집안 출신으로, 10대 시절 [[나치]]에서 출세해 보려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으나, 사생아였던 아버지를 버린 친할아버지가 실은 [[유대인]]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뉘늦게 알고 방황했다고 한다. 결국 유대인인 자신[* 나치 기준은 1/4 이상, 즉 조부모 중 1명 이상이 유대인이면 유대인 혈통으로 간주되었다. 헬무트 슈미트는 이 기준에 따르면 유대인으로 구별되었다.]이 나치에서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치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후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